김윤길세상보기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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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인생관
등록일2016-03-21 12:43:33
작성자게시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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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자유스럽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팡세 중에서-

날씨 좋고 나들이 하기 좋은 날에 고전 사상책인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있으려니 머리가 몽롱해 집니다.

그래도 기필고 읽어야 하기에  읽었는데....문장 하나 하나에 무척 많은 지혜와 감동을 가져다 주는 군요, 읽고 나서 한번쯤 되새겨 보면 좋을 내용을 피씨에 타이핑 치다보니 손가락이 얼얼해 지지만 그래도 어느 시간 못지 않게 값진 시간 같아 흐믓 함이 가득 하네요. 텍스트가 많아 그렇지만...그래도 잠이 안올 때 읽으면 금방 잠이 올 것 같아 일부분의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올려 봅니다.   

혹시라도 늦은밤 잠이 오지 않으시면 이글을 읽으면 금방 스르르 잠이 올것도 같네요.

제 홈피에서 다시금 읽고 여기에 복사하여 올려 보았습니다.

-김윤길- 

 

 

파스칼의『팡세』중에서..

 

 

1.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의 정신의 상위에서 기하학적 정신의 원리는 매우 분명 하지만 우리주변에서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것에 익숙하지 않아 그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돌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면  그 원리들을 뚜렷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아주 흐릿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지나쳐 버릴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여러 원리들에서 그릇된 추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2. 

어떤 질서의 사물에 대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만 다른 질서의 사물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잇다. 결국 그들은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몇 가지의 원리만으로도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은 판단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많은 원리를 가진 사물에서 올바른 결론을 얻고 있다. 곧잘 직관에 의해서만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은, 추리를 해야만 하는 사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먼저 단번에 통찰하려 하며 원리를 추리하는데 매우 서툴기 때문이다.

 

3. 

뚜렷한 기준 없이 어떤 일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남을 대하는 것은 시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남을 대하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아직 4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나는 내 시계를 보고 전자에게 “당신은 나태에 빠졋소”라고 말하고, 후자에게는 “당신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고 있소.” 하고 말한다. 실제로 이미 한 시간 반이 지났기 때문이다.

 

4. 

다른 사람을 보람 있게 훈계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려면 그 사람이 사물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들은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견지에서는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실한 점을 누가 깨닫게 하고 그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다른 면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이에 대해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모든 각도에서 사물을 관찰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그다지 화를 내지 않지만, 과오를 범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아마 이것은 사람이 본래부터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과, 감성에 의한 지각은 언제나 진실하기 때문에 사람이란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데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이란 대개의 경우 타인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이유보다는 스스로 찾아 낸 이유로 더 잘 납득할 수 있다.

 

5. 

언어는 배치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의미는 배치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 게 된다. 웅변 그것은 쾌적하고도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쾌적은 그 자신의 진실에서 우러나온 것이라야만 한다. 말을 억지로 사용하여 대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균형을 잡기위해 필요도 없는 들창을 만드는 사람과 같다. 그들의 목적은 정확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형태를 만들려는 것이다. 균형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밖의 다른 형태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균형은 인간의 용모에도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균형을 그 높이나 깊이에서가 아니라 넓이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6. 

시인이라는 간판을 내세우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게 된다. 수학자도 이와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교양 있는 사람은 간판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시인과 자수공의 직업에도 거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 교양인은 시인이나 기하학자나 그 밖의 무엇으로도 불려지지 않지만 그 모두가 될 수 있으며, 그 심판까지도 될 수가 잇다. 사람들은 누가 교양인인지 판별할 수 없다. 그들은 어떤 자리에서든 그곳의 화제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따름이다. 그들의 재능이 다른 어떤 재능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그 재능을 사용해야 할 때이다. 사람들은 그가 그것을 사용할 때에야 비로서 알게 되는 것이다.

 

7. 

인간은 언제나 욕구로 가득 차 있어,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만을 사랑한다. 인간은 만능일 수가 없다. 모든 일을 한꺼번에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조금씩 알아야한다. 한 가지 일을 완벽하게 알기 보다는 조금씩이나마 모든 일을 아는 편이 훨씬 낳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성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좋은 것이다. 물론 양자를 함께 지닐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중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전자를 택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세인이란 때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진리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지라도, 적어도 자기생활의 질서를 세우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당연한 일은 없는 것이다. 외적 사물에 관한 학문은 고뇌에 빠졌을 때 도덕에 관한 나의 무지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적 학문은 외부의 사물에 관한 나의 무지를 위로해 줄 것이다. 너무도 많은 술, 너무 적은 술 그에게 술을 조금도 주지 말라. 그러면 그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너무 많이 주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8. 

우리가 인간을 알고자 한다면 그가 생존하는데 공기는 왜 필요한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또 공기를 알기위해서는 공기가 인간생활과 그런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꽃은 공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를 알기위해서는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며,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며, 간접적이기도 하고 직접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또 모든 사물은 가장멀리 있는 것이나 서로 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서로 결합시키는  자연적이고도 알 수 없는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전체를 모르고 일부를 안다는 것은, 일부를 모르고 전체를 알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9. 

육체적인 절름발이는 불쾌하게 하지 않은데, 정신적인 절름발이는 우리를 불쾌하게 함은 무슨 이유일까? 육체적인 절름발이는 우리가 바로 걷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정신적인 절름발이는, 마치 우리가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할망정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의지의 행위와 다른 모든 행위 사이에는 보편적이고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의지는 신앙의 중요한 기관의 하나이다. 의지가 신앙을 형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물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진실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한다. 의지는 어떤 측면을 다른 측면보다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사물의 특질을 이성이 보지 못하도록 한다. 이와 같이 이성은 의지와 함께 나아가면서 의지가 좋아하는 측면만 보려고 하며, 자기가 본 측면에 의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자애와 인간의 자아의 본성은, 자기감능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결함과 비참에 가득 차 있음은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10.

그는 위대해지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미소함을 알게 된다.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비참을 목격하는 것이다. 완전해 지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의 불완전을 알고 있다. 남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자기의 결함으로 인해 남들의 혐오와 경멸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가 당면한 이 곤란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정하고 죄 많은 정욕을 그의 마음에 일어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깨닫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하여 심한 증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진실을 없애버리고 싶지만, 진실 그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으므로, 자신의 의식과 남의 의식 속에서 힘이 닿는 데까지 그것을 파괴한다. 그것은 자기의 결함을 남과 자기 자신에게까지 감추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그 결함을 자주 지적하거나 남이 보는 것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함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악이다. 그러나 결함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은 것은 더욱 큰 악이다. 그것은 고의적인 카착 위에 결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에게 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남이 자기분수에 맞지 않게 우리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남을 속이는 것도,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존경을 남에게서 받으려는 것도 모두 잘못된 일이다. 그러므로 남이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함이나 악덕을 지적해 준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11. 

어떤 일을 제시하여 다른 사람의 판단을 구할 때, 그 사람의 판단이 흐려지지 않도록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만일 우리가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든가, “나는 그것이 어둡다고 생각한다.” 든가, 혹은 이와 비슷한 말을 하면 상대방의 견해를 그의 의견으로 유도하거나, 또는 그 반대방향으로 상대방의 생각을 끌어가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그때 상대방은 있는 그대로, 즉 그 당시의 상황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우리가 만들어 낸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아래서 판단한다. 적어도 우리는 그 사물에 아무것도 부가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우리의 침묵에 부여한 의미나 해석에 따라서, 또는 상대방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동작이나 목소리 등에 따라서 그 침묵이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는 별문제로 하고 말이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그 본래의 입장을 벗어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와 같이 현명한 판단이란 그만큼 어렵고 극히 드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자신이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거짓말을 하기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12. 

우리가 건강할 때에는 병에 걸릴까봐 걱정 하지만, 막상 병에 걸리게 되면 쉽게 약을 먹는다. 병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기분 전환을 위한 유희나 산책을 하고 싶다는 욕망도 건강할 때에는 일어나지만, 일단 병에 걸리고 나면 이미 그런 욕망은 일어나지 않는다. 병에 걸렸을 때의 욕망과 건강할 때의 욕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은 사람에게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알맞은 욕망을 부여해 준다.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에게 주는 두려움인 것이다. 두려움이란 우리가 처해있는 상처에다 우리가 이르지 못한 상태에 대한 욕망을 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를 어떤 상태에서든 불행가게 하므로 우리의 원망이 우리에게 행복한 상태를 그리게 한다. 그런 바람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처에다 우리가 처해있지 않은 상태의 즐거움을 첨가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즐거움에 도달한다 해도 그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 이르고 나면 또 다른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인 명제를 모든 경우에 적용해야 한다.

 

13. 

모든 것은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다. 인간의 성질이란 그 얼마나 다양한가! 얼마나 많은 종류의 직업이 있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직업이 좋다는 말을 듣고 우연히 그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가! 자연은 다양하면서도 닮아있다. 인공은 닮아 있으면서도 다양하다. 시간이 고뇌나 투쟁을 치료해 주는 것은, 인간이 변하여 전과 다른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욕을 준 사람도 모욕을 받은 사람도 이미 이전의 그들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전에 한번 분노하게 한 국민과, 두 세대를 지나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물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볼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눈으로 본다. 우리는 사물을 똑같이 보려 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믿기 쉬우면서도 어렵고, 겁이 많으면서도 대담하다. 우리가 열중하고 있던 일에서 떠날 때의 권태. 한 남자가 즐거운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5, 6일 즐겁게 논 후에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일상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운동에 잇다. 완전한 휴식은 죽음이다. 만일 어떤 군인이나 노동자가 자기의 노고에 대해 불평 한다면, 아무 일도 시키지 말고 내버려 두면 된다.

 

14. 

정념도, 직무도, 오락도, 전심도 없이 완전한 휴식 속에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참기 어려운 일은 없으리라. 그때 그는 자기의 허무 ․ 고독 ․ 부족 ․ 종속 ․ 무능 ․ 공허 등을 느낀다. 그의 영혼의 깊은 밑바닥에서는 권태 ․ 우울 ․ 비애 ․ 고뇌 ․ 원망 ․ 절망이 솟아날 것이다. 실물을 보고 아무도 감탄하지 않은데, 그것을 묘사한 그림을 보며 흡사하다고 감탄하게 되니, 그림이란 그다지 공허한 것이다. 하찮은 사물이 우리를 위로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고독하게 하기 때문이다.

 

15.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서 살라고 하는 것은, 행복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말 그대로 행복하게 되어 고민거리가 될 어떤 원인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유자적하며,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처지가 되라고 그에게 권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충고인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안정을 피한다. 그들이 찾는 것은 모두 소란스러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무엇이 참된 행복인가를 아는 본능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그 본능을 남에게 보여주려는 허영과 즐거움. 그러므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잘못이다. 그들이 소란을 단순한 심심풀이로서 추구 했다면, 그들의 잘못은 그 추구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은 오히려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을 손에 잡게 되면, 정말로 행복하게 될 것처럼 생각하여 그것을 추구하는데 있다.

 

16. 

인간은 장애물과 투쟁을 벌이면서 안정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애물을 넘고 나면 안정은 참기 힘든 것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재나 미래를 위협하는 비참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인간은 안전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권태가 본래 뿌리박고 있던 마음 밑바닥에서 일어나 그 독소로써 정신을 채우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매우 불행하므로, 권태를 느낄 이유가 전혀 없을 경우에도 그 본래의 기질 때문에 권태에 빠지는 것이다. 또 인간은 너무 공허하기 때문에 권태에 빠질 많은 본질적 원인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공놀이 같은 아주 사소한 놀이로도 충분히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목적으로 그런 것을 하느냐고 당신들은 물을지 모른다. 그것은 다음날 친구들에게,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잘 놀았다고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이때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대수문제를 자기가 풀었다고 학자들에게 보이기 위해 서재에서 땀을 흘린다.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요새를 점령했다는 것을 후에 뽐내기 위해 극도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어리석은 짓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현명하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식한 체하고 싶어서 쓸데없는 것까지 연구함으로써 생명을 단축시킨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들은 우매한 짓인 줄을 알면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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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용은 인터넷에서 퍼온 내용임>

팡세는 프랑스의 철학자 B.파스칼(1623~1662)의 유고집.

 

팡세는《명상록(瞑想錄)》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1670년 간행되었다. 파스칼은 그의 만년에 〈그리스도교의 변증론(辨證論)〉을 쓰려고 하였으나 병고로 실현하지 못하고, 사후(死後)에 1,000편에 가까운 단편적인 초고(草稿)가 정리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

 

너무나 자유스럽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파스칼의 '팡세'의 구절중에 나오는 이 문장은 파스칼의 금욕적생활과, 수도적 생활을 보여주는 좋은 말입니다.천 여개의 짧고 긴 문장으로 쓰여진 이 책 '팡세'는 파스칼이 신에 대해서 생각했던 많은 부분을 보여주는 책이다

 

'팡세'는 완성된 책이 아니다. 파스칼이 '기독교 변증론'을 쓰기 위한 재료로 기록한 924편의 단장들을 그가 죽은 뒤에 편집한 것이다. 이 책은 병고와 금욕의 4년 동안에 수시로 씌어진 정신의 산물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천재가 무조건 성서의 기적을 믿고 오직 '기적만이 종교의 기초다'라고 단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무한대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알 수가 없다. 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신의 본질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내기를 걸라.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하는가? 그대가 만일 존재한다는 편에 걸어 그대가 이긴다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대가 진다 하여도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신은 존재하다는 편에 내기를 걸라"고 파스칼은 권고하고 있다.

 

'팡세'는 단장(斷章)임에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의 존재에 대해서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팡세'를 '미완성의 성전' 이라 하는 까닭도 여기 있으리라.

 

파스칼이 '팡세'에서 의도한 바는 기독교야말로 확실성과 명증(明證)을 지니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나 신성(神性)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나 이단자 및 비신앙자들을 논박하는 데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논증하는가? '팡세' 첫 머리에 나타나 있는 대로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 - 이 두 가지의 종합적 방법에 의해서였다. '기하학적 정신'은 논리로써 증명하고 결론을 지으며, '섬세한 정신'은 직관적으로써 원리와 질서를 찾아내어 사람들을 설득한다.

 

파스칼은 지식과 현세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병고를 지닌 채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 서른 다섯 살 때였다. 그때부터 4년, 39세로 죽을 때까지 여기 저기 쓴 것이 이 프랑스 정신의 최고봉 '미완성의 성전'이라 불리는 '팡세' - '기독교 변증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