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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실패하고 나서 좌절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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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체험담
등록일2016-03-21 12:43:00
작성자게시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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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실패하고 나서 좌절 그리고 ...

(부제 : 치욕과 좌절의 굴레를 벗어나 다시금 일어서는 오뚜기처럼)

김 윤 길


광란의 시내 밤거리의 네온사인이 비틀거리며 길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유혹하는 것을 보니 벌써 12월의 終點(종점)으로 치닫는 크리스마스캐롤과 送年會(송년회)를 내세워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한해의 가 버림을 되새겨볼 시간도 없이 흥분된 분위기에 휩싸이는 시간들...

벌써 한해가 다 갔구나 ! 하는 아쉬움의 감탄사 속에 나는 이제야 진정으로 올 한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치욕(恥辱)과, 좌절(挫折)과, 절망(切望) 속에 나는 2001년의 새해를 반갑지 않게 맞이 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한해가 이제 벌써 다 지나가고 이제는 그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젊은 血氣(혈기)와 패기(覇氣)를 앞세워 그저 인생이란 자기 스스로 개척해가고, 길이 없으면 길을 열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깊지 못한 생각으로 폭탄 선언을 하게 되었다. 그 폭탄 선언이란 나의 가정과 가족과 어머님께 크나큰 피해가 갈 수 있는 폭탄선언이었다는 것은 힘들게 된 지금에 와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1999년 겨울, 나는 오랜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풍운의 꿈과 理想的(이상적) 회사 건설이란 거창한 구호 아래 내가 꿈꾸던, 내가 생각하던, 내가 하고 싶어했던, 그런 그 꿈과 같은 모든 일을 현실에서 실현 하고자 株式會社(주식회사)를 직접 설립한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었다. 이때 내 나이 32살. 지금에서야 생각 해보면 바로 나와 나의 가정에 불행을 씨앗을 뿌리던 그 序幕(서막)이 올라온 시기였었던 것이다.

내가 그 회사를 설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선 내 아파트와 중형차를 타고 다니던 나를 항상 부러움을 살 정도로 조금은 풍족하게 회사 생활을 하던 시기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주에 三災(삼재)가 있는 시기이니 삼재가 끝나면 무슨 일이든 시작하라고 간곡한 만류를 하신 어머님의 충고를 뒤로한 채 "모든 일이 잘되니 어머님은 걱정안하셔도 됩니다" 라는 답을 드리고 사업에 뛰어 들었다.

푼돈 모아 어렵게 직장 생활로 모아서 아내와 아이들의 보금자리인 31평 아파트를 팔고 나머지는 형님에게 빌리고 해서 株式會社(주식회사) 設立(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리저리 모아 보니 약 3억원 정도, 사실 나한테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풍족한 생활에서 우리 가족은 낡고 좁은 아파트의 전세로 보금자리를 옮겨서 그저 나 잘되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식회사 설립에서부터 직원 채용 그리고 회사 관리까지 모든 일을 나 혼자 처리하느라 밤잠을 자지 않고서 일만을 쫓아 다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입보다는 지출이 많게 되고 회사 운영 자금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지라 항상 돈 구하러 다니기에 바빴다, 技術(기술)과 營業(영업)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그렇게 나의 이상적인 회사 운영이 현실에 부딪혀 서서히 침몰하는 風浪(풍랑) 앞의 돛단배와도 같았다.

그리고 2001년 2월 드디어 나는 그 회사 운영을 더 이상 끌고갈 수 없는 처지에까지 자금 압박을 받고 있었다. 중대한 결심을 내려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더 이상의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 회사를 休業(휴업)신고로 사실상 회사 운영을 종료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어머님께 죄송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당신께서는 내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당시에는 만류를 하셨지만, 사업이 시작된 뒤로는 80세가 다 되어 가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농사일에 거칠어진 손마디에 큰 유리항아리속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서 나에게 갖다 주셨다, 종이학 천 마리면 소원을 들어주실 거라고 하시면서......

나는 지금 초라한 전셋집의 낡은 장식장 속에 어머님의 희망과 염려와 혼이 담긴 종이학 천 마리가 담겨진 유리 항아리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저며옴을 참을 수가 없으며, 그저 소리 없는 흐느낌과 속죄의 눈물만이 흘러내릴 뿐, 내가 지금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빚과 돈 달라는 은행의 독촉 전화에 매달려 하소연하는 게 전부였다.

나 혼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아내와, 어린 두 딸과, 그리고 자식의 성공을 간절히 기원하시던 어니님께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안겨 준 대가를 나는 분명히 치르고 싶다. 그 대가가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과, 자존심이 찢기는 수모를 당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저 그 대가에 감사할 줄 아는 성숙된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는 그렇게 고통과 좌절과 죽음을 생각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2001년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어 3개월간을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방안에서 한발 자국도 떠나지 않은 폐쇄된 공간 속에 내가 나를 스스로 포기하는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좌절에서도 내가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내의 배려와 도움 덕이었다.

아내는 하루종일 컴컴한 방안의 이불 속에서 좌절의 흐느낌에 빠져 있는 나에게, 어떠한 잔소리나, 원망도 하지 않고 그저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항상 용기를 주려고 애썼으며, 생활의 궁핍함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인 나를 대신해 직장을 구하여 나의 역할을 대신 해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내의 그 배려에 가슴속 깊이 감사하는 마음 변지 않고 있으며 반드시 좋은 날이 오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한다.

나는 평소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고, 또 형님과 누님 등 가족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위급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땐 아내와 어머님만이 초라한 내 옆을 떠나지 않으셨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다는 것이 이제는 이해가 가는 것 같다.

고향 친구, 사회 친구,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정말 몇 사람을 빼놓곤 대부분이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없이 연락을 끊고, 더 나아가 혹시나 내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을 벌일까 봐 나의 연락을 꺼려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진정한 친구란 무엇일까? 서로 좋을 때 친구는 그저 친구일 뿐이겠지. 내가 배부를 때 주는 풍족한 고기밥보다는 배고파 허기져 있는 사람에게 주는 빵 한 조각이 더 값지고 실질적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란 쉽지가 않은 듯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정말 그 엄청난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친한 친구에서부터 그 누구에게도 어떠한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한 사람들에겐 내가 구차하게 도움을 청하기가 싫었으며, 또 내 자존심에서 허락을 하지 않아서 이다.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정으로 걱정해 주고 작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는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말이 정말 와 닿으며, 이제는 더욱 성숙된 내가 되고 싶다. 풍랑에 휩쓸리지 않고, 삶의 중심을 잡고, 두 번 다시 같은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은 신중함으로 앞으로의 내 삶에 희망의 길을 현실에 놓아서 "시작은 초라하지만 끝은 성대하리라"라는 말을 실현시키고 싶다.

그리고 "有志必勝(유지필승)" 이란 휘호를 직접 써 주셨던 교수님이자 동양화가이신 노전 선생님의 말씀처럼 뜻이 있으면 반듯이 승리할 수 있도록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외적인 겉모습보다는 정신 수양과 속이 찬 정말 내실 있고 마음이 풍족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이제는 喜怒愛樂(희노애락)의 삶속에 즐거운 일에는 정말 호탕하게 웃을 수 있고, 슬픈 일에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그리고 가식적인 생활보다는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하고 남에게도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2001년의 아픔과 고통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면서 다만 아픈 과거에서 느꼈던 값진 경험과 교훈을 바탕 삼아 2002년에는 새희망을 가지고 내 인생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서 꿈을 성대히 이루는 元年(원년)이 되도록 熱心(열심)히, 誠實(성실)히, 最善(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겠다